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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추석

by 오늘 하루 행복하기 2024. 9. 22.

 

어린 시절 추석의 기억은 명절 전 시장을 보는 일로부터 시작을 한다. 어머님은 쇼핑할 목록을 종이에 적고 동네 입구에 있는 시장으로 가서 장을 봐 오셨다. 나는 엄마를 따라 시장을 가서 여기저기 상점을 구경하며 구입한 물건을 손에 들고 분주한 명절 분위기를 즐기곤 했다. 한두 번의 시장 나들이로도 부족해서 나와 동생은 잔 심부름으로 한 두 가지 재료를 구입하러 시장을 뛰어가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멀지 않았던 때인데 이제는 이런 풍경이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향수로 남아 기억 속에서만 자리하고 있다.

 

추석 전날 오전에는 아침부터 나물들을 다듬고, 생선을 씻어 정리하고 부침 거리를 준비했다. 오후가 되면 본격적으로 전을 부치기 시작한다. 한두 시간에 끝이 나지 않는 일이기에 방바닥에 기름이 튀지 않게 넓게 종이를 깔고 자리를 잡는다. 엄마가 동그랑땡 속을 준비해 주시면 넓은 쟁반에 한 입에 들어갈 만한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가지런히 놓는다. 동생은 동그랗게 만들어진 모양에 밀가루를 입히고, 나는 널찍한 직사각형의 전기 프라이팬에 계란물을 묻혀 부치기 시작한다. 동그랑땡 부치는 냄새는 온 집안에 퍼져 나간다. 노릇노릇하게 맛있게 구워지면 맛보느라 하나 집어먹고, 배고파서 하나 집어먹고, 맛있어서 집어먹다 보면 엄마가 말씀하신다. "상에 오르기 전에 다 없어지겠다!" 동태 전도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리고 같은 방법으로 부친다. 소고기 산적과 생선 부침등 솜씨가 필요한 음식은 살림의 고수인 엄마가 하신다. 모든 맛을 내는 고난도의 작업도 수십 년 주부 경력을 지니신 엄마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온 식구가 둘러앉아 송편을 빚는다. 그때는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워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송편을 만들고, 쪄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송편이 쪄지면서 나는 솔잎의 향이 얼마나 좋았던가! 송편을 이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해서 예쁘게 만들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애를 써가며 만들었건만, 바쁘게 정신없이 만든다고 하는 엄마의 솜씨를 좀처럼 따라가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친척, 친지들이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안부를 묻고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는 것이 매년 추석이 되면 행해지는 일련의 행사였다. 명절이 가까이 오면서부터 명절이 낀 그 주말까지 이런저런 손님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손님이 오시면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무엇이 그리 좋았던지, 그분들이 들고 오는 선물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어색해서 그랬던 것인지, 나는 안절부절을 못했던 것 같다. 아침에 제사가 끝나면, 또는 명절 다음날, 온 집안 식구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양손 가득 음식과 선물을 싸 들고 방배동에 사시는 큰 어머님 댁을 방문했었다. 무뚝뚝한 큰 어머님은 별말씀은 없으셨지만, 퉁명스러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우리를 맞이하셨다. 큰 어머님은 우리 엄마를 만나면 며느리가 잘 못한다느니, 아들이 당신에게 이렇게 잘한다느니 하는 넋두리를 늘어놓곤 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도 명절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큰 집과 우리 집을 통 틀어 하나뿐인 아들인, 그 당시 우리 식구 중 가장 출세했다고 할 수 있는 오빠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학용품 선물과 돈 봉투를 주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잔뜩 싸가지고 온 명절 음식은 한동안 우리를 행복하게 했었다.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동네 입구에서 버스에서 내려 온 집안 식구가 선물 가방을 잔뜩 들고 집으로 걸어 돌아가던 어둑어둑했던 그 길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의 속도가 점점 빨라짐에 따라오고 가는 왕래의 횟수도, 손님들의 방문도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셨기에 추석이 가까이 오면 세계 유명메이커의 술병들이 선물로 들어오곤 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술을 조금이라도 덜 드시게 하려고 엄마와 나는 그 술병들을 숨겨놓기까지 했던 적도 있었다. 큰 어머님이 요양원으로 모셔지고부터는 큰 집과의 오고 가는 왕래는 점점 뜸해져 갔다. 그러는 동안, 큰 언니와 형부가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고, 작은 언니네 가족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삶의 변화에 따라 명절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더 명절이 싫어졌다. 기다려도 올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만이 부모님 곁에 남아 회사에서 받은 선물을 양손 가득 들고 와 잠시나마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마음이었으니, 표현은 안 하셨지만 엄마 아버지는 얼마나 더 공허한 마음이 드셨을지 상상이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도 한국을 떠나왔다. 이러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때의 풍경이 이 추석에는 생각이 난다. 그래서 더욱더 명절을 잊고 살려했는지 모르겠다.

 

호주에 와서 살면서 한국과는 다른 스케줄로 생활을 하며, 새해도, 추석도 그리 한국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있다. 한국에 사시는 분들도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삶에 맞게 변화시켜 추석 명절을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의 한 친구는 추석 다음날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한국을 돌아볼 수 있게 늘 그곳을 지켜주시던 부모님도 이제는 모두 돌아가셨다. 가족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어 함께 모여 명절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지 않는다. 이제는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이런 변화는 우리 집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너무나 흔한 현상이 되어버린 지금, 카톡으로 추석 인사를 하니, 미국에 사는 큰 언니가 한국식으로 추석 제사를 지냈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가족을 꾸린 두 아들들 내외와 아직 싱글인 막내아들이 모두 모여 1박 2일로, 첫날은 추석 음식을 준비하고, 둘째 날에는 제사를 지내며 추석의 풍습을 지키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억하며 온 가족이 모였었다고 이야기를 전해왔다. 큰 언니가 보내준 제사상 위의 부모님의 영정 사진을 보며 미국에서나마 돌아가신 부모님이 제사음식을 즐기실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 생각되었고, 큰 언니를 향한 고마운 마음이 뭉클뭉클 올라왔다. 자식들의 삶의 무대가 다양해지다 보니 조상님들의 영혼의 움직임도 넓어지고 있다. 우리네 조상의 영혼들도 세계를 무대로 움직이고 계신다. ㅋㅋㅋ

 

나의 어릴적 추석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이렇게 남아있다. 그 시절이 아늑히 그리워진다.